역사

아픈 역사가 담긴 주조장

시바다 히코헤이는 일본 군마현에서 1895년에 태어나 1920년대에 전남 강진에서 친구와 함께 일하다가, 1927년 무렵에 해창마을에 들어오게 되었다. 시바다씨는 이곳에서 6남매를 낳고 살았는데 광주와 목포에 정미소를 두고, 해창에 쌀 창고를 운영하면서, 배 3척을 가지고 일본을 오가며 미곡상을 했다. 시바다는 아버지가 일본에서 목재상을 했기에, 목포를 통해서 목재를 들여와 3년 동안 말린 뒤에 이 건물을 지었다고 한다. 살림집은 다다미방을 갖추고 실내 복도와 가파른 나무 계단이 있는 2층 목조 건물이다. 1층에 거실이 2개, 방이 5개가 있고, 복도가 있다. 장작을 때는 부엌과 다다미방과 복도는 개조되어 없어졌지만, 건물 외형은 예전과 다름없다.

해창주조장 바로 앞에는 맞배지붕 형태의 창고 1동이 있고, 길을 건너 천변쪽으로 향하면 형태가 잘 보존된 돔형 창고 2동이 있다. 돔형 창고 옆에는 허물어진 정미소 터가 있다. 모두 일제 강점기 때 만들어진 공간으로 역사의 아픈 상처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에는 조세로 거둔 곡식이 해창 포구 어딘가에 쌓여져 있었겠지만, 그 흔적은 남아있지 않다. 현재 남은 창고는 일제 강점기에 해남 땅의 곡식을 수탈해갈 때 사용했던 시설물들이다. 겉면은 비를 가리기 위해서 양철판이 대져 있고, 그 안에는 흙과 대나무가 몸체를 이루고 있다. 세월에 녹슨 외벽 철판은 붉게 또는 초록으로 녹슬었지만, 창고 안의 높다랗게 걸쳐진 서까래며 도리며 들보는 지금도 건재하다. 창고에는 잡동사니가 가득해서 창고로서 기능을 하고 있지만, 군데군데 바람 구멍이 나서 한 해가 다르게 낡아가고 가고 있다.

바다의 창고, 해창의 추억을 간직한 일제 강점기 곡식 창고는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켜져야 한다. 비록 아픈 상처지만, 그 상처를 통해서 근대사를 보고, 해창마을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아픈 곡식 창고가 새로운 문화 창고로 탈바꿈하는 날이 오기를 희망한다.